낱장; 나, 타, 나는 공간
박지나 개인전 <부록; 낱장의 형태>
2017.07.17~07.25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낱장을 무시하지 말자. 우리의 피부는 언제든 그 부피 없는 낱장에 긁힐 수 있다.
그렇게 긁힌 틈을 통해 얼마든지 감각은 침투할 수 있다.
위험한 보충물(附錄)
한정된 지면에서 밀려나 덧붙여지는 형식으로만 살아남은 것. 심지어 박지나 작가가 가리키는 부록들은 어느 본지(本紙)의 소속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부수적이다. 본지는 자기 자신만으로 온전하기 때문에 부록들을 떼놓고 달아나버린 지 오래다.
작가는 그동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흩어졌던 낱 것들을 그러모아 부록 하나 냈다. 낱 것들이라 함은 그가 장르 사이를 가로지르며 차곡차곡 모으고 걸러낸 부피도 색도 없는 작품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록으로 오는 과정을 한 번 훑어 봐야겠다. 작가는 첫 번째 개인전,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에서 조형물을 만들고 그 중 몇몇을 압착했다. 부피를 가진 허공들은 사진으로 납작해졌다. 우리는 이 작품이 실재했는지도 알 수 없는 한 장·면으로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면 안에 갇힌 작품들은 물질과 비물질, 단단함과 말랑함 등의 대립을 일축하는 실험 대상이 되었다.
그 다음 전시 <발끝과 목소리>의 계단과 발끝은 오로지 납작한 형태로만 보존되었다. 목소리를 전하는 나팔만이 공중에 귀를 열었을 뿐이다. 작품이 납작해지는 동안 그가 쓴 ‘시’라는 것을 구성하는 글자들은 전시장의 바깥에서부터 점점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글은 조각의 부피를 빼앗고, 압착된 조형 위에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조각이 되었다. 시와 소리와 사진이 조각이 되는 낱장이 오가는 장르는 일정치도 온전치도 못하다. 그들은 서로의 빈공간을 채우며 동시에 조각을 받칠 뿐이다. 부록은 본지만이 아니라, 예술의 경계도 허문다.
부록은 흠이 없는 완전성을 부인하는 기획이다. 작가에 의하면, 그리고 데리다의 말을 빌자면, 본문의 원본성, 기원성은 허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열지 못하는 체계다. 부록이라는 존재 자체는 본지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며, 그 경계를 오염시킨다. 그리고 연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 그리고 타자를 위한 공간을. 부록이 ‘온전’하게 애초의 기획을 수행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전시에서 부록을 이루는 낱장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해석에서 달아나기 때문에 진단이 불가능하다. 다만 온전하지 않고, 진단할 수 없는 그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 기획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아닌 말들(否錄)
흐늘거리는 “종이(로 된)조각”, ‘부록’들은 자신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평면작품처럼 벽에 기대어 걸리기도 하고, 혹은 그 약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터의 힘을 빌어 덜렁 펄럭 흔들리기도 한다. 꿋꿋한 종이조각들의 공통점은 낱개로 걸렸다는 것이다. 이런 낱장의 내용을 얽어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뜯겨질 운명의 껍데기인 봉투에 적힌 글들을 좇는 것은 무의미하며, 움직이는 낱장들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설사 그것을 읽는다고 해도 단어 사이사이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가능에 대한 막연한 피로를 느낄 수 있다. 본지 없는 부록, 그마저도 낱 것들이 흩어져 만들어내는 혼란 속으로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완전하게 보이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보이도록 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다시 그 피로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 ‘낱’의 낯이 왠지 익기 때문이다.
또 다른 부록, ‘그는 낱장의 형태로 서 있었다.’ 불안정하게 서 있는 이 낱장들은 앞의 부록과 달리 아예 아무 내용이 없지만 자신의 무게에 못 이겨 등이 굽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종이는 단지 그 스스로의 무게에만 못 이긴 것이 아니다. 어떤 무거운 글자, 쓰일 수 없는 문자들에 등이 굽은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게 무엇인지 도저히 밝혀낼 도리가 없다. 아마 작가 자신도 부르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할 것이다. 그 자신도 본인의 발견과 사유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밝혔다. (그래서 종이 고정 장치에서 낱장은 계속 떨어졌나보다.) 작가 본인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완전하게 알고 있다면, 작품 앞에서 우리의 존재는 거주할 공간을 잃게 되지만 이 경우엔 다르다. 우리는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작품 앞에 초대받았다. 비어버린 의미의 틈에 잠시 거하면서 아무것도, 아무도 없음에 더 맞서보기로 한다.
떠다니는 말들(浮錄)
첫 번째 개인전부터 ‘rappa’에선 시 읽는 소리가 똑똑 떨어졌다. 못에서 온 세상을 비추는 물방울 같은 허공이 벌어질 때부터, 하늘을 향한 나팔에서 목소리가 튕겨 나와 다시 낙하하고 있다. 커다란 소리를 내야할 나팔은 조곤조곤 공기를 집어 삼키고 내뱉는다. 그 반복 속에서 당신의 입으로 들어갔던 공기는 우리의 입으로 들어간다. 라파는 그렇게 소리를 삼켰다, 뱉었다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종이가 아닌 알루미늄 ‘rappa’가 등장했지만 금속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볼륨이 조금 더 높아졌을 뿐 작가는 여전히 낱장으로 소리를 모은다. 말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전시장을 떠돌게 될 것이다. 허공을 가르고, 우리 몸에 와서 부딪힐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말은 직접적이지 않고, 흔적에 가깝다.
불친절한 낱들 속에서 당신의 감각은 쪼그라들었나, 더 열렸나. 그래서 말인데 작품 감상이야말로 하나를 깊이 파야 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정말 보이는 것일 뿐, 감각이 열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서도 없는 논술 같은 작품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이 와중에 뭔가 알 것 같이 보이는 낱장의 ‘네’. ‘네’들이 벽에 둥둥 떠 걸려 있다. 어떤 네가 가만히 대답할 때를 기다리고, 어떤 네가 빙빙 돌아가고, 어떤 네가 휙휙 돌아가며, 응답 중이다. 작가는 이 작품이 “나를 가능하게 하는 선재적 타자를 위한 응답”이라고 한다. ‘네’들은 내가 올 것을 알지 못했지만 작품 앞에 서서 응답을 받는 우리들을 타자로 만든다. 작품 앞에서 나는 작가가 미리 응답을 내고 기다렸던 타자가 된다. ‘낱’이 낯익었던 이유. ‘낱’들은 타자들을 끌어안은 나고, 낱장은 나와 타가 나는(낱아나는) 공간(場)이다. 우리는 그를 가능하게 만들고, 우리 역시 우리에게서 발견한 타자로 인해 존재 가능해진다. ‘네’가 어느 순간 나‘에게도’ 대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타자 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작가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불혹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 작가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유혹을 뿌리쳤다. 그저 마음속에 남은 흔적과 부스러기만 모았다. 그는 부스러기를 낱장 위에 고요히 모시고, 우리(그가 말하는 타자)가 얼굴을 남길 수 있도록 한 귀퉁이를 비워놓았다. 잠시 세워둔 낱장들은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지만, 그것조차 고정시키겠다고 욕심 부리지 않는다. 그것을 잡는 것도 포기한다. 흔적과 부스러기로 남는 나머지들은 언제나 끝도 없이 생성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부록이라고 칭해진 작품이 언제든 재인쇄 가능한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은 작가가 제대로 나이 먹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게 시든 조각이든 작가는 부록을 통해 자기 자신이 나머지, 타자라는 것을 은근히 밝힌다. 그의 작품은 두 팔 벌려 자신을 먼저 끌어안고 있다. 여기서 유일하게 온전한 것이 가능한, 타자를 위한 환대를 위해서다. 부록은 내 안의 타자를 끌어안고 스스로 사랑하고 살아가기를 기원하고 기록하는, 엮이지 않을 연대다. 그리고 언젠가 각자의 낱장이 쌓이게 되면 권위 없이도 어떤 책보다도 무겁게 될 것이다. 물론 바람은 계속 불어오겠지만.


■배우리(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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