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이 가득한 몸에 관한 디오파네스*의 해설
박지나 개인전 <허공이 가득한 몸 Bodies in the Void> 
2023.03.10~03.31 10의n승
예술가는 그리움을 품은 사람들이라네. 깊은 상사병에 걸린 자들이지. 하지만 그들은 누워서 시름시름 앓고 있지 않다네. 병은 깊지만 건강한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갈구하는 것을 그려대고 찍어대고 만들어대곤 하지. 예술은 지독한 그리움과 그것을 찾아야만 하는, 고통스럽게 타들어 가는 욕망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일세. 그렇지 않은 예술이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 정도로 해소될 욕구라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스포츠를 즐기면 된다네. 그리고 예술가는 늘 쓸 만한 경계심을 갖고 있지. 땅의 경고를 미리 알아내는 새만큼이나 예민하기 때문에 그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면 왜 그런지,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어.
형식과 내용이라는 것이 이제는 모두 뒤죽박죽돼있는 이 시국에 그저 무언가를 조물조물(造物彫物)하는 감각만이 예술가가 가진 전부인지도 몰라. 여기 이 사람을 보게. 뭔가를 조물조물하고 있네. 그건 여성도, 남성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언어도, 정치도 아니고, 민족도 아니야. 상품은 더더욱 아니지.
이 사람은 인간이 지금 같은 모양이 아니고, 몸이 등 쪽에 두 개씩 붙어있던 그때를 기억해냈어. 알지 않나. 그건 내가 2500년 전쯤 향연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것과 같아. 인간의 성(性)이 셋이었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 말이야. 자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간단히 말해보겠네.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몸은 둘이 하나였어. 등이 붙은 채로 말이지.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이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네. 각각 해, 땅, 달의 자손이지. 이들은 힘과 활력이 좋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어. 그래서인지 신들을 공격하고자 했다네. 제우스는 자신을 위협하는 이 몸들을 가만히 둘 수 없어서 둘로 잘라버렸지. 힘이 약해지면 방종을 멈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때부터 인간들은 두 다리로만 걷게 된 걸세. 본성이 둘로 잘렸기 때문에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면서 서로 만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됐고 말이야. 제우스는 인간들이 제멋대로 군다면 한 번 더 둘로 자르겠다고 했어. 코를 중심으로 몸을 갈라서 외다리로 다니게 하겠다고 말이야. 아직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다시 이 덩어리 좀 보게. 두 몸이 붙어 있어. 내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텐데 자신의 반쪽을 찾아가고 있네. 물론 온전하지 않아. 그가 꿈에서 본 것이 그리움 자체이기 때문에 온전한 형태를 만들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어쨌든 이 자는 자신도 잘 모르는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에 가득 차 있어. 그러니 조물조물하는 짓을 그만둘 수 없는 거겠지.
자, 이 몸들이 화면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게. 나는 이들이 “사다리”에 올라가는 중이라고 말하고 싶네. 지금은 물질(조각)과 비물질(디지털 이미지)의 경계, 깨달음과 타락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 도달한 듯하네. 차곡차곡 n층의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이라고 가정해 보세. 만약 이 예술가가 끝까지 올라간다면, 다시 말해서 그가 잃어버려 찾고 있는 몸의 대상을 찾는다면, 불완전한 몸은 다른 모양으로 다시 태어날 거야. 하지만 그리움의 대상을 찾는다면 더 이상 조물조물 행위도 필요 없어진다네. 꼭대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비밀스럽게 지켜지는 법이거든. 그렇다고 해도 그리움을 향해 예술가는 더 나아간다네.
놀라운 건 여기 외다리도 있다는 거야.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제우스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도 모르겠네. 물질 너머의 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의 짓인지도 모르지. 아무튼 이 인간은 새만큼 예민해서 이미 외다리가 될 두 다리 인간의 최후를 알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당하겠네. 우리가 방종할 때, 다르게 말해서 마땅히 그리워해야 하는 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면 맞이할 최후 말이네. 그게 바로 예술가가 불안해하는 일일 거야. 그는 스스로 사다리에 타, 올라서 우리가 그리워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만 하네. 우리가 왜 둘로 쪼개졌는지 기억해내야만 지금의 혼돈도 끝날 거야.
예술가들이 뭘 그리워하는지 지켜봐야 할 이유네. 우리는 기억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할 일일 테니까.
나는 이 자가 끝까지 오르기를 바라면서도 영원히 그 끝에 닿지 않길 바라기도 한다네.
*플라톤 『향연』 중 사람의 모양에 관해 연설한 아리스토파네스와 에로스의 사다리에 관해 연설한 디오티마를 합친 가상의 인물. 참고로 사다리 맨 꼭대기에는 아름다운 것 자체, 비의(秘儀)가 기다리고 있다.
**“디오파네스”는 그래픽 가상과 머신러닝의 세계를 이렇게 은유했다. 둘의 상관관계를 현재 확신할 수 없지만, 가상 세계가 현실을 닮아갈수록 현실의 화가, 조각가들은 완벽한 모사보다 덩어리와 물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배우리(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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