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 미니멀’의 세계
Humidity Controller
2012.10.29~10.23 Anthracite
박지나의 작품은 간명하다. 미니멀하다. 대개는 사물이나 상황이 둘 나타난다. 하나가 아니라 둘. 서로가 나타남으로 인해 서로가 최소한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 둘이 나타나는 미니멀은 신선하다. 무엇보다도 우선 시각적으로 낯설기 때문이다. 그리 낯선 모양도 없는데 낯설다. 왜일까,를 따라가다 보면 모양이 아니라 거기에 깃든 감각이 낯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어느 작품에나 전도된 시선이 있다. 그러나 이분법이 작용하지 않는 것은 논리로 뒤집은 세계가 아니라 감각으로 뒤집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회색의 못이 있다. 구부러진 곳 없는 단 하나의 못. 두드리기 좋게 둥근 머리를 가진. 낯선 광경은 못 끝에서 부풀어 오른 방울이다. 못이 녹아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고정관념이 강한 쪽. 못 끝이 만나고 있는 방울은 허공이다. 박지나는 이 장면을 「터진 허공, 못 끝에서 벌어지다」라고 한다. 재미있는 퍼즐의 시작. 다 알다시피 못은 단단한 곳을 뚫고 들어간다. 그렇다면 허공은 단단한 곳인가. 허공을 뚫고 들어간 것은 못인가. 그러나 못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면? 허공이 못 끝에서 벌어졌다. 허공은 자신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과연 먼저 안을 개방한, 또는 상대의 안으로 침투한 것은 어느 쪽인가.
못은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허공은 불확실한 것이다. 허공은 보이지 않는다. 남김없이 보이는 것이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허공은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다.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허공 속에 무엇인가가 들어설 때 허공은 나타나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못’과 ‘허공’처럼,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은 먼 것이다.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 박지나가 포착한 못과 허공은 붙어 있다. 마치 서로에게 단 하나의 세계처럼 존재한다는 듯한 못과 허공. 같은 성질을 가졌다. 같은 색이다. 서로 충분하다고 하지도, 서로 완강한 무엇을 주장하지도 않으면서 최소한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설명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감각의 미니멀.
비는 물이다. 물줄기는 세로로 길다. 비는 허공의 세부다. 비는 못 끝에서 터져버린 허공의 집합이다. 크고 작은 허공을 매달고 내리는 못이 비다. 여기에 비옷을 입혀주었다. 비옷이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중심적. 비옷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비일 거다. 물이라는 허공으로 되어 있는 비도 한번쯤은 산뜻한 방수 재질 비옷을 입어보고 싶었을 거다. 흰 비옷을 입고 비는 내린다. 유머러스하고 귀엽고 슬프다. 허공에는 비옷을 입은 비들. 허공에서 내리는 것이 아니라 허공으로 머무는 순간, 그것이 비.
뼈는 길고 긴 뼈는 뼈와 닮은 색인 미색 천에 덮여 있다. 단단한 뼈와 부드러운 천이 만나서 단단한 뼈 위에 부드러운 천이 덮일 때 그것은 부드럽고 나직한 빛의 풍경이 된다. 간결하고 적막하기도 하다. 이상하다. 뼈에 천을 씌워주었을 뿐인데.
박지나는 주물을 떠 못을 만들고 허공을 만들고 뼈를 만든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설치나 사진 작업을 한다. 그녀의 작품은 이분법 안에 놓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만나게 해서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얼핏 보면 모르지만 극단적인, 그러니까 가장 먼 것 두 개(확실/불확실, 단단함/부드러움)를 닿게 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가장 먼 둘이 이어지는 데도 이분법적이지 않은 것은 둘의 성질이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아니 성질이 변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의 기능적 용도가 탈각되기 때문이다. 못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걸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허공은 무엇인가가 들어서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허공도 벌어지고 싶을 때는 제 안을 터뜨리는 것이다. 못은 더 이상 어둠을 의지하지 않는다. 뼈는 살에 붙어있지 않으며 천은 관념을 덧씌운 무엇이 아니다. 뼈는 진작 관념에서 해방되었다. 성질이 변했다는 것은 비로소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었다는 뜻. 못 그 자체로, 허공 그 자체로 돌아갔다는 뜻.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타나야 하는 것에 포커스가 있으므로 박지나의 작품에는 여백이 생겨나지 않는다. 나타난 최소한이 명확한 것은 안의 격렬함이 미니멀의 감각으로 존재하기 때문. 그녀의 ‘감각적ㅡ미니멀’은 현상학에 가깝다. 꼭 나타나야 할 것, 그것은 생각 이전에 감각이 아는 것이다. 그녀의 미니멀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전도된 사물과 전도된 세계는 다르게 보고자 하는 감각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느낌으로 뒤집은 세계는 다름 아닌 ‘해방’ 그것이다.
박지나가 만들어낸 새로운 자리에서 못은 흰 뼈가 되어 날기도 한다. 못을 허공과 같은 성질로 만드는 힘. 못을 뼈와 같은 색으로 만드는 힘. 박지나의 감각이 열어 보이는 미니멀이 기대되는 이유다.
■이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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