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보이는 시적인 풍경들
[박지나 개인전: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
2014.09.23~10.11 SPACE22
박지나의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 전시 포스터를 보면, 나무로 만든 무언가가 일상의 어느 시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쏟아진 빛은 그 반대쪽을 향해 강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완전한 형체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닮아 보이는 나무 조각이 관객의 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나뭇결을 가로질러 군데군데 터져있는 표면을 보면, 나무는 여전히 형태의 변화를 스스로 모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위로 솟아 있는 구(球) 형태는 언젠가 또 다시 일어날 형태의 운동을 예시한다. <빗방울은 물이 없는 곳에서 생겨났다>(2013)라는 시적인 제목의 이 작업은 일상에 대한 작가의 내밀한 사유를 통해 드라마틱한 한 장의 사진으로 완성됐다. 그는 이처럼 일상의 평범한 사건이나 상황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지점에 습관처럼 빠져들곤 한다. 그는 그곳을 가리켜 “허공”이라 말한다.
허공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나 배경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공간도 아니다. 개별적으로 기능할 수 있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다. [박지나의 작가노트 중에서]
박지나가 말하는 “허공”은 현실에 난 작은 구멍과 같다. 간혹 다른 지점, 다른 세계로 넘나들며 사유할 수 있는 “의미의 틈새” 공간처럼, 그곳은 텅 비어 있지 않고 오히려 역동적인 사유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거기서 그는 개별 사물들이 일으키는 새롭고 낯선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그것은 때로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매우 시적이다.
| 시적인 대상들
평소 박지나는 작업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시를 쓴다.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하여 그는, “나를 어떤 대상의 세계에 옮기는 일”이라 했다. 이는 그가 어떤 가시적인 대상 안에 잠재되어 있는 비가시적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시를 쓴다는 말이다. 기호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시적언어의 혁명 La Revolution du langage poetique』(1974)에서 질서정연한 상징적 기호 체계와 그에 맞서는 원초적인 상태, 즉 구조화된 언어와 그 이전의 반-문법적이고 파괴적인 언어의 층위를 끝없이 왕복하는 개념으로 시적 언어를 설명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박지나의 사진은 일상의 사물이나 형태를 통해 단일하게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시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선택한 대상들이 스스로 의미를 해체하고 다시 통합해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크리스테바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 Ferdinand Céline)의 소설에 대해 “자유로운 자발성을 가진 문체”라고 표현했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에 의해 선택된 “시적 대상들”은 마치 자유로운 자발성을 가진 시적 언어처럼, 크리스테바의 말대로 “사유나 윤리의, 혹은 합법화된 단일성의 억압”을 피한다.
박지나의 <허공, 못 끝에서 벌어지다>(2012)는 그가 대상의 존재를 증명해나가는 시적인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사실, 사진 속 상황은 명백한 모순이다. 끝에 빗방울을 매단 채 수직적으로 떨어지던 못은 그대로 공중에 박힌 듯 멈춰있다. 이 초현실적인 장면에서 우리는 현실과의 어떠한 상관성을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박지나는 “실재했던 허구의 순간”이라는 불가능한 상황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그는 불투명한 대상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물성이 강한 재료들-알루미늄, 레진, 나무 등-을 사용해 현실에 존재하는 지시적인 형태를 더욱 강조했다. 하지만 못은 그 자체의 내재적 형태뿐 아니라 외부 어딘가에 허공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박지나가 쓴 동명의 시에서도 못은 세계 안에 수많은 허공을 만든다. 형태의 흔적은 대상이 존재하는/했다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신체적 표상으로서의 직접적인 알리바이인 셈이다. 그는 현실세계가 규정하는 대상을 선택해서 그것이 스스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원형의 세계를 엿본다. 그래서 사진 <허공, 못 끝에서 벌어지다>에는 흔적, 즉 허공을 달고 있는 못이 등장한다. 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들처럼, 박지나의 사진에서는 허공(대상의 흔적)을 매단 못(대상)이 붙잡아둘 수 없는 빗줄기처럼 세계 안으로 쏟아진다. 역설적이게도 박지나의 사진은 붙잡아 둘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멈춰있다. 설치작업 <비, 쏟아지다>(2012)와 또 다른 사진작업 <다섯 개의 비와 다락>(2012), <다섯 개의 비와 강>(2012)에도 수많은 의미와 흔적을 함의하고 있는 그 시적 대상들이, 금방이라도 일제히 쏟아질 듯 긴장의 순간을 연출하고 있다.
| 우연한 풍경들
그가 연출한 풍경들은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시적 은유처럼, 현실을 벗어난 텅 빈 허공에서 가끔 상상해 볼 법한 이질적인 풍경이다. 박지나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들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이 우연한 풍경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의 사진 또한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시를 쓰듯, 그는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조각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그것이 스스로 공간 속에서 능동적인 움직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단일한 상징적 틀을 없애고 그 순간을 사진 찍는다. 다소 거친 비유겠지만, 그가 손으로 재현한 조각적인 형태는 구조적인 언어에 속하며, 그것의 능동적인 움직임은 형태 속에 잠재되어 있는 원초적인 의미로서, 그 둘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하나의 시적인 풍경은 완성된다. 마치 시적 언어의 혁명처럼 말이다. 예컨대 <나사못과 종이 손잡이>(2012)에서 극적인 긴장은 보다 강하게 드러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허공에서 풀려버린 나사못은 그 몸체에 무언가를 암시하는 골격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형태와 의미로 해체되어 간다. 또 살짝 보이는 종이 손잡이와의 관계 속에서도, 그 움직임의 방향은 일방적인 질서에서 벗어나 오히려 아래로 향하는지 위로 향하는지 모호할 정도로 사방을 향해 크게 열려있다. 이 찰나의 풍경은 작가의 시적 상상에 의해 전개된 우연의 순간이며, 사물이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사유의 흔적이다.
보통 사진작업을 위해 박지나는 그가 상상한 시적 대상들을 먼저 구체적인 형태들로 만들어 본다. 그가 만든 형태들은 대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오브제”이지만, 그는 그것을 가능한 상황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시적 상상을 멈추지 않는다. <rappa>(2014)와 <둘이 들고 가는 가방>(2014)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오브제들이지만 우연한 순간에 실제의 공간에서도 작동한다. 두 개의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rappa>에서는 작가가 낭독하는 그의 자작시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소리는 나팔의 형태가 무색할 정도로 너무 미세해서 귀를 바짝 갖다 대어야만 비로소 듣게 된다. 박지나는 항상 그런 태도를 유지한다. 큰 소리로 분명하게 말하기 보다는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개인의 무뎌진 감각을 더욱 자극한다. 앞선 사진들도 그랬다. 그가 제시한 사건과 풍경들은 대개 상징적인 언어의 논리와 조금 비껴있으므로 그것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개인의 우연한 시적 상상에 기대고 있다. <둘이 들고 가는 가방>만 보더라도, 그는 겉으로 보이는 완전한 수평의 논리 보다 그 수평선 아래 감춰있는 개인의 상이한 조건들을 강조하는 듯하다.
박지나는 이번 전시 [스스로 움직이는 것들]에서, “아직 무언가가 아닌” 대상에 대해 사유했다. 스스로 움직이며 의미와 형태를 찾아가는 그것은, 붙잡아 둘 수 없는 시적 언어처럼 언제나 폭발적이고 변화무쌍하다.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강렬한 빛 때문에 정작 대상을 완벽하게 바라 볼 수조차 없는 <나와 정면에 관한 짧은 노트 1~2>(2014)처럼, 박지나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의 주변을 맴돌다가 “문득 보이는 우연한 풍경들”을 기록해둔다.
■안소연(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