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나의 <발끝과 목소리>에 대한 단상들
[박지나 개인전 : 발끝과 목소리]
2016.04.08~04.28 최정아갤러리
Ah! Whoever finds the print of my bare feet,Will he cease for long to think only of himself?
Paul Valéry, La Jeune Parque

박지나는 그녀의 두 번째 개인전 <발끝과목소리>에서 ‘존재함’에 대한 내밀한 사색들을 아득한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발’과 ‘소리’는 이번 전시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띄는데, 이는 아마도 이러한 신체 기관(혹은 그 기관의 기능들)이 존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 천착시키는데 어떤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리라. 박지나는 “발끝과 목소리 사이 어디쯤 ‘내’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모양 없이 떠있고 … 그냥 끊임없이 정지하면서” 있는 존재이다(시<있었다>). ‘나’는 “느닷없고, 손이 없고, … 태어나지 않는 것” 이며(시<유령으로>), “풀을 밟고 기우뚱”하더니, “소리 나는 빨간 털이 자라는 팔꿈치”를 달고 “어쩌면 유리였을지도, 어쩌면 골목이었을지도”모를 공간을 걷는 존재이다(시<산책 같은>). 이 알 듯 모를 듯한 유령 같은 ‘나’는 박지나의 시적 세계 안에 거주한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시를 써왔고, 이 싯귀들은 곧 사진이나 조각, 설치의 형식으로 변주될 어떤 사유들의 임시적 거처가 된다. 발끝과 목소리의 미묘한 촉감에 의해서나 간신히 가늠될 것인 이 사유의 거처는 그런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혹은 바타유의 표현을 빌면, ‘무정형(formless)’의 세계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형성이 아니라 해체를, 상승의 에로스적 충동이 아니라 존재의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타나토스적 충동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의 틈으로부터 존재에 대한 박지나의 부단한 의심과 갈등이 배어 나온다. ‘시’로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심장한 기억의 구술로서, 말들은 제 ‘발끝’이 딛고자 하는 깊은 바닥과 ‘목소리’가 머무르는 천공 사이를 눅진한 새벽 안개처럼 채우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 시인 폴 발레리가 말하듯, 너의 작은 문장들이 나에게 되돌아오고, 마치 그곳에 있는 것이 즐거운 마냥 속에서 메아리친다는 점이다(폴 발레리<시와 추상적 사유>). 발레리에게 이러한 메아리는 우리가 ‘위대한 침묵’이라 부르는 긴 절필의 시간 이후에 찾아왔다. 그런데 박지나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말들의 회귀’와 ‘즐거운 메아리’를 시연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들에 놀랄 만큼 선명한 질감과 윤곽을 주는 조각과 사진이라는 이중의 언술 장치들이다. 이것은 사실 역사적인 것이다. 가령 말라르메(발레리를 절필에 이르게 한)가 압도하는 사유의 불가능성을 단지 텅 빈 노트로서 표현하고 말았을 때, 누군가에게 이 시의 중단은 그림의, 혹은 조각의 시작처럼 여겨지기도 했다(미니멀리즘에 대한R. 볼하임의 글을 보라). 더 이상 명징한 심상이 사유에 안착하지 않을 때 혹은 그러한 사유들을 전달할 언어를 찾을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시가 멈춘 곳에서 박지나는 나아간다. ‘발끝’이 주는 익숙한 시적 긴장은 발의 조각과 그것의 사진들로부터 낯설게 쇄신된다. ‘세모난 계단’에 대한 우리의 모호한 추상은 그것이 마음 밖으로 나와 눈앞에 펼쳐지자 놀랍게도 선명한 ‘메아리’가 된다. 박지나는 시와 조각과 사진 사이의 이 내밀한 상보적 연관을 발견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박지나의 세상은 바닥이 없는 곳 같다. 바닥이 없기에 사물들은 중력을 거슬러 퍼지고 부풀고 흩어진다. 박지나가 그녀의 첫 번째 전시에서 증명했듯, ‘허공이 못 끝에서 벌어지는’ 일쯤은 이 바닥 없는 세상에서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바닥 없는 세상에서 박지나의 ‘발끝’은 결코 닿지 않을 세계의 바닥을 더듬어 간다. 그리고 이내 그 ‘발끝’은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담담히 증언하는 ‘목소리’로 연결된다. 어떻게 “춤추고, 빛나고, 느닷없는 것, 손이 없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을 말할 수 있을까? 발레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시인[] 일시적 매개체일 시인은, 순전히 자기가 받은 것을 전달하므로,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역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므로, 그가 것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신비한 목소리에 의해 구술될 뿐이다. 그는 그가 모르는 언어로 시를 있었다.” 그래서일까, 전시장에서 우리는 박지나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전하는 신비스러운 목소리’에 이끌린다(<Rappa>연작). 자신의 몸에 머문 것들을 건네는 작가의 목소리, 그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빗소리가 날 것’이라고 박지나는 내게 말한 적 있다. 또, “목소리는 의미의 세계에서 벗어난 상태”이며, 그 “순간 비언어를 위해 스스로를 개방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흔적을 간직”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작가노트). ‘Rappa–입을 크게 벌려 말하기.’ 그녀는 ‘모르는 언어로 시를 쓰고 그것을 구술한다.’ 이 목소리는 “크게 벌린 발끝에서 쏟아지고” 그렇게 “희미한 목소리로 전달”되면서 “발끝과 목소리 사이 어디쯤 있을 나(작가노트)”를 증언한다. ‘나’와 다른 세계에서 바닥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는 ‘너’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그런 증언들 …
다시 사진과 조각으로. “당신의 물 당신의 물,” “한 방향으로 선 포장박스”처럼, “흰 비 내린” 오후처럼, “벽에 붙어 있는 그 조금씩 삐뚤어진 것들” – 사진들은 저 부윰한 세계에 모서리를 만들고, 경계와 앵글을 만든다. 그로부터 우리는 박지나의 발끝이 더듬는 세계의 윤곽을 본다. 그런데 그것은 발이 아니라 발의 본, 떠 내어진 발이다. 발이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발의모형도 아닌 것, 발로부터 찍혀져 나왔지만 그것의 생체성을 잃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발의 흔적인 것. 이론가들(R. 크라우스)은 그러한 조각을 인덱스(index)에 포함시킨다. 그 어느 것도 아닌 채 ‘부재한 현존(the absent presence)’을 증명하는 사진-인덱스처럼 말이다. 사진과 조각 사이의 이 유사성은 그래서 다시 부재한 현존을 증언하고 있는 박지나의 목소리(‘비언어를 위해 스스로를 개방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흔적을 간직한’)와 결합한다. 어떤 필연적인 매체적 연관성이 시, 사진, 조각 사이를 관통한다. 마치 그녀의 어긋난 싯구들이 끊임없이 의미 관계를 배반함으로서 ‘비언어’로서의 시적 세계관을 집요히 관철시키려는 것처럼, 사진과 (거푸집) 조각 역시 부재와 현존 사이의 절박한 자기모순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러한 시적 요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빗방울은 물이 없는 곳에서 생겨났다’라고 언젠가 박지나는 말했다(2014개인전). 그때의 생각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발끝과 목소리는 몸이 없는 세계, 언어가 없는 세계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렇게 몸과 말, 형식과 의미의 단절과 부재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니 그녀가 “주홍씨, 민수씨, 재구씨, 주현씨 … ”라고 부를 때(사진 <언어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목소리>), 우리는 그들의 소환이 아닌 그들의 부재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러나 빗방울은 그러한 ‘부재로부터 온다’고 했다. ‘목소리는 언어의 흔적을 간직’하고, ‘발끝은 허공의 흔적을 간직한다’고도 했다(작가노트). 박지나의 세계에서 모든 부재한 것들은 어떤 집요한 흔적으로 머무르려 한다. 그래서 관객들은‘계단이 세모가 되고, 나는 너보다 먼저 돌아가게 되고, 앞집 남자가 반짝반짝 작은 별같이 울고, 발이 꼬이고, 꼬인 발은 풀리지 않고 …’ 하는 박지나의 위태롭고 모순에 찬 심상들이 시 속에, 사진 속에, 조각 속에 자신의 발자국을 고스란히 남기고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박지나의 작업에서 대립하는 것들은 이러한 “대립들이 무화되는 공간”을 향해 그렇게 항상 앞서 나간다. 언제나 어긋나는 발끝과 바닥, 목소리와 그것의 간절한 의미들,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 운명은 이 속에서 서로 간의 먼 거리를 가늠하고 또 수긍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젊은 여인 파르크의 맨발을 찾는 이들(언제나 어긋나는 자신의 소망과 운명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그녀의 발자국을 따를 텐가’라고 묻는 발레리의 물음이 박지나의 맨발 앞에 마주 선 관객들에게 똑같이 물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저만치 앞서 나가는 운명에 대한 굴복으로서가 아니라, 어떤 쓸쓸한 희망 같은 것으로서, ‘바람이 불자, 살아야겠는 것처럼…’
■최종철(미술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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