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life of Art
박지나 개인전 <흔들리는 언어 Afterlife of Language>
2019.06.21~07.09 탈영역우정국
탈영역우정국의 박지나 개인전 <흔들리는 언어(Afterlife of Language)>를 방문했다. 난 재작년에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에서 개최된 그녀의 개인전 <부록 ; 낱장의 형태>를 보았고, 작년에는 최정아 갤러리에서 열렸던 그녀의 개인전 <받아쓰기(Dictation)>도 보았다. 베케트(Samuel Beckett)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The Unnamable)>를 몸으로 받아쓰기 한 그녀의 <받아쓰기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말이다.
난 당시 박지나의 <받아쓰기>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일 8시간씩 한 달 반 동안 지속하는 치열한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난 당시 베케트가 ‘머리’로 글쓰기를 한 것이라면, 박지나는 ‘몸’으로 글쓰기를 한 것이라고 중얼거렸다. 베케트가 불가능한 ‘글쓰기’를 계속 하듯이, 박지나 역시 불가능한 ‘몸쓰기’를 계속한다고 말이다.
이번 탈영역우정국의 박지나 개인전 <흔들리는 언어>는 작년 그녀의 개인전 <받아쓰기>와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그녀의 <흔들리는 언어>는 3개의 영상작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3점의 영상작품들은 흥미롭게도 ‘삼각형-파티션’으로 제작한 스크린에 상영된다는 점이다.
구 창전동 우체국인 탈영역우정국으로 들어서면 ‘삼각형-파티션’의 첫 번째 면을 만난다. 난 의자에 앉아 영상작품 <눈먼 언어>를 보았다. 그녀의 <눈먼 언어>는 어느 밤에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종이에 열라 글을 쓰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은 작품이다. 남자는 자필로 종이에 졸라 열심히 글을 쓴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가 쓴 글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다! 보여주는데 너무 빨리 혹은 겹치게 혹은 흐리게 보여준다. 따라서 남자가 종이에 무신 글을 썼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와이? 왜 박지나는 관객이 읽을 수 없는 글쓰기 행위만 보여주는 것일까?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삼각형-파티션’의 두 번째 면으로 간다. 난 의자에 앉아 두 번째 영상작품 <언어의 성취>를 보았다. 그녀의 <언어의 성취>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어느 남자가 테이블에 앉아 종이에 열라 글을 쓰는 장면을 영상으로 담은 작품이다.
남자는 무엇인가를 보고 자필로 종이에 졸라 받아쓰기를 한다. 그리고 남자는 받아쓰기한 종이들을 테이블에 쌓는다. 오잉? 그런데 남자가 무엇인가를 보고 받아쓰기하는 것이 이상하다! 왜냐하면 그가 받아쓰기를 위해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텅 빈 테이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받아쓰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카메라는 그가 쓴 글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다! 마지막에 그는 자신이 받아쓰기한 종이를 손으로 잡고 들어 보는 것을 카메라가 포착한다. 그런데 종이는 텅 빈 것이 아닌가? 4B연필로 A4용자에 열라 쓴 것이 텅 빈 종이라니…
문득 박지나의 <받아쓰기 ‘이름 붙일 수 없는 자’>가 떠오른다. 머시라?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요? 박지나의 ‘불가능한 글쓰기’, 즉 그녀의 ‘불가능한 ‘몸쓰기’ 말이다. 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삼각형-파티션’의 세 번째 면으로 간다. 난 의자에 앉아 세 번째 영상작품 <흔들리는 언어>를 보았다.
박지나의 <흔들리는 언어>는 백색의 공간에 두 남녀가 등장하여 서로 대화하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담은 아름다운 영상작품이다. 백색의 무대에는 서로 다른 형태의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는 것이 전부이다. 맨발의 남녀는 배경처럼 절제된 현대무용을 보여준다. 당신이 영상을 직접 본다면 전문가의 카메라 워킹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나의 <흔들리는 언어>는 제목처럼 ‘움직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남녀의 대화는 도통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다. 머시라? 혹 그들의 말이 <눈먼 언어>처럼 ‘잡음’으로 들리느냐고요? 아니다! 그들은 말은 잘 들린다. 더욱이 그들의 말은 화면에 자막으로까지 적혀져 있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은 마치 <언어의 성취>처럼 말(글)은 했으나(썼으나) 들을 수(읽을 수) 없는 말이라고 말이다. 말은 하지만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들의 대화가 마치 ‘선문답’처럼 들린다고 말이다.
박지나는 친절하게도 영상에 자막으로 남녀 대화의 출처를 밝혀놓았다.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1962)이 그것이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은 어느 호텔에 머물고 있는 한 여자와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자와 이웃한 방에 있는 남자가 여자에게 신호를 보내 그의 방으로 오게 해 두 남녀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에게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고자 한다.
내가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듯이 <흔들리는 언어>는 <언어의 성취>처럼 말(글)은 했으나(썼으나) 들을 수(읽을 수) 없는 말이라고 말이다. 따라서 난 그들의 대화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지만 허탕치고 만다.
물론 난 그들의 대화에서 의미를 기다리지만 이내 망각하고 만다. 결국 그들의 대화는 의미를 넘어 나에게 ‘목소리’만 남아 있다. 그런 까닭일까?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은 ‘음악적 추상화’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박지나는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을 ‘시각적 추상화’로 표현해 놓았다. 따라서 관객은 그녀의 <흔들리는 언어>을 붙잡아야만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흔들리는 언어>는 작가와 관객이 함께 쓰는/표현하는 일종의 ‘공동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지나는 “오직 표현될 수 없는 것만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내버려” 둔다. 와이? 왜 그녀는 표현하지만 표현되지 않는 것으로 내버려두고자 하는 것일까? 혹 그녀가 내버려 둔 표현되지 않는 것을 관객이 표현하도록 하기 위해서?
블랑쇼의 글쓰기는 일명 ‘재난의 글쓰기(L’Ecriture du ‘Desastre)’이다. 재난의 글쓰기? 그가 말하는 ‘재난’은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인간의 재앙이었던 아우슈비츠의 체험을 뜻한다.
블랑쇼는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성의 절망과 환멸을 체험했다. 따라서 그에게 아우슈비츠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 ‘사유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블랑쇼의 ‘재난의 글쓰기’는 일종의 ‘불가능성의 글쓰기’가 아닌가?
그렇다! 그의 ‘불가능성의 글쓰기’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절망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질문’은 ‘기억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란 말인가? 블랑쇼는 ‘기억의 불가능성’을 ‘망각’으로 본다.
블랑쇼에게 ‘망각’은 ‘기억할 수 없는 것을 기억하고자 할 때’ 나타난다. 따라서 망각은 ‘기다림’ 속에서 우리를 ‘바깥’으로 이끈다. 여기서 블랑쇼의 ‘바깥의 사유(pensee du dehors)’가 등장한다. ‘바깥의 사유’는 사유의 끝에서 만나는 ‘사유의 한계’를 암시한다.
‘사유의 한계’는 그에게 ‘타자’의 문제로 출현한다. 그의 ‘타자’는 자기동일성의 부정, 즉 나 자신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자(quelqu’un)‘이다. ‘어떤 자’는 떠돌면서 ‘바깥’과 관계를 맺고 ‘중립’을 뜻하는 ‘비인칭’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비인칭’은 블랑쇼이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자, 이제 어떻게 블랑쇼의 글쓰기와 박지나의 ‘몸쓰기’가 작가와 관객이 함께 쓰는/표현하는 일종의 ‘공동의 텍스트’가 되는지 감 잡으셨죠?
■류병학(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