맴맴 돌기
박지나 개인전 <흔들리는 언어 Afterlife of Language> 
2019.06.21~07.09 탈영역우정국
명징한 단어를 찾아 아무리 헤맨다 한들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언제나 소통의 불가능성뿐인지도 모른다. 박지나 작가는 애초부터 의미를 나누는 것을 포기했던 것 같다. 그는 조각에서 사진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빈 종이로 옮겨가면서 조형언어의 이미지를 내려놓는 동시에 시적언어를 키워 조형언어의 틈을 메우면서도 벌리는 실험을 해왔다. 작가에게는 조형언어도, 시적언어도 완전한 의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어눌한 두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말해야만 하는 것, 불러내야만 하는 것을 기다리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와 조형이 짝을 이룬 박지나의 작품은 우리가 아무것도 읽지 못하도록 펄럭여왔던 것이다.
다섯 번째 개인전 〈흔들리는 언어(Afterlife of Language)〉는 작가가 천착해 온 두 예술의 언어를 종이가 차지하는 얇은 공간마저 포기해버린 비물질적이고 복제 가능한 영상매체로 보여준다. 작가는 연출자가 되어 그간 스스로 해오던 몸짓―쓰기, 말하기, 미끄러지기, 빛을 바라보기―을 타인인 연기자와 무용가들이 반복하게 했다. 그리고 이 영상은 복제되어 원래 존재하지 않던 ‘가상의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삼면탑의 발견
전시장에 들어서면 ‘Y’자로 난 길에 세모난 모퉁이 건물 같은 구조물이 영상을 받치고 있다. 왼쪽으로 가도 되고, 오른쪽으로 들어서도 되지만 보통의 우측보행 상식으로 관람객은 우측의 영상, 〈눈 먼 언어〉를 먼저 접하게 된다. 검은 밤, 깜빡이는 조명과 그 조명의 버튼 소리 아래, 한 남자가 눈을 깜빡이며 ‘~치기 시작했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무언가를 쓴다. 조명은 계속 깜빡이고 카메라가 비추는 건 남자의 한 쪽 눈과 읽을 수 없는 겹치고 누운 글씨다. ‘묘지에 있었어’라는 글씨를 본 것 같은 상상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언어가 눈 먼 건지 보는 이가 눈 먼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채로 검은 화면을 지나 이젠 낮의 흰 화면으로 넘어간다. 이전 화면에서 봤던 인물은 또 무언가를 쓴다. 깜빡임도 없는 진지한 하얀 화면에서는 뭔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관람객은 침을 삼키고, 그는 어떤 중세 수도원의 황망한 필경사 표정으로 쓰고 또 쓴다. 종이가 조각처럼 쌓인다. 드디어 그가 다 쓴 종이를 들어 보인 순간, 종이는 비어있다. 〈언어의 성취〉라는 제목은 역시나 언어는 아무것도 확인시켜주지 못한다는 믿음의 표시인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 박지나의 작품에서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 이거야말로 예술의 종말인건가. 종말의 감각을 끌어안고, 삼각 구조물에 비친 처음 보았던 마지막 영상으로 간다. 여성과 남성 둘은 짐짓 심각하게 대화를 벌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긴 하지만 어떤 맥락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 서로의 몸은 붙었다 미끄러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붙잡기를 반복한다. 마지막에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앉는다. 그리고 여자가 말한다. “어떤 것이 오고 있어요. 기다림 바깥에서 오고 있어요.” 제목은 〈흔들리는 언어〉.
영상 속 타인들은 작가가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안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는 것은 관람객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어김없이 작품 앞에서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종말은 드디어 왔다. 우리는 그저 무언가를 좇는 남성의 눈, 깜빡이는 빛,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아무리 써도 채워지지 않는 하얀 빈 종이, 그리고 결코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는 남녀의 대화와 몸짓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영상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앉아서 보기, 그리고 어떤 의미도 건지지 못한 채로 또 다른 영상을 보는 일, 화면의 깜빡이는 빛을 피부로 흡수하기 같은 것이다.
처참한 수동의 세계로 이끄는 2차원의 영상에 절망할 때 쯤 작가는 조각을 제시한다. 이미 제시되어 있었지만 눈치 채지 못했던 하나의 탑. 영상을 받치고 있던 삼각의 구조물이다. 의미를 건질 수 없다는 의미밖에는 건질 수 없는 영상이 끝나면 다시 또 비슷한 상황에 놓이기 위해 다른 영상 앞으로 탑돌이 하듯 나아간다. 이 때 조각은 발걸음을 이끌면서 제한한다. 조각이 유일하게 허용하는 건 몇 번이고 도는 것뿐이다. 섣불리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다. 〈흔들리는 언어〉 앞에서 여자가 말한 “기다림 바깥에서 오고 있”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이게 조각의 암시다. ‘이게 뭐야’ 하고 가버리면 작가가 지은 가상의 공간, 기다림 바깥은 허물어진다. 이미 오래 전에 왔던 예술의 종말을 다시 끌어안고 흐릿한 눈을 깜.빡.하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소용없는 걸음으로 다시 돌아야 한다. 아마도 더 기다린다면, 흔들리는 언어 속에서, “땅의 흔들림”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듣는 음성은 우리가 조각 앞에서 기다리는 한, 올 준비를 하고 있다.
언어의 포기
박지나 작품 바깥의 미술계에는 ‘미적 경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숭고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 이미지화하는 온갖 스펙터클 연출들이 넘쳐난다. 반대의 경우, “체험”에 집중하느라 전시장에서 요가나 명상을 하면서 아예 조형언어 고민이나 연구 과정을 삭제해버리기도 한다. ‘미적 경험’이 예술품의 억지 아름다움으로 가능하다고 세뇌하거나, 혹은 조형예술보다 더 쌈박한 ‘존재’를 매체(media) 없이 바로 만나고자 하는 이런 시도들은 (웬만하면) 소비로 귀결될 뿐 번번이 실패한다. 박지나 작가는 그런 점에서 기존의 조형언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제시한다. 의미 전달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심상(心象)을 나눠야만 하는 예술가 존재의 불행이지만 작가는 묵묵히 이 불가능성을 말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이전 전시)나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처럼 불친절한 텍스트를 빌려오는 것도 빛이 있던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어긋나기만 하고 실패할 언어들의 고독한 시간 자체를 나누기 위함이다. 이 전시의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재현해서 그 환희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아마도 보였던 것)의 보이지 않음을 나눈다는 데에 있다. 명확한 상징을 가진 잘 짜인 연출극들은 결국은 불명확한 언어의 이전과 사후를 헤매는 부조리극이다. 이 극에서는 타인을 이해하거나 타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의 몸짓을 반복하면서 미미하게나마 우리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다.
나의 부채
작가는 삼각의 영상 덩어리 옆 작은 방에 이제껏 전시에서 가방이나 책, 나팔 등 무거운 의미와 상징을 지닌 작품을 짊어졌던 ‘받침대’들을 세워두었다. 작은 받침대들은 필경사 바틀비처럼 ‘~하지 않는’ 편에 섰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채 스스로 서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의미를 나누는 것, 혹은 관계에 집착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긍정이다. 우리가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올 것이고, 이미 왔을지 모른다는 걸 함께 믿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다. 충분하다. 어눌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어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 그러니 예술이라는 것이 실핀에 벽이 기대듯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는 걸 작가가 보여주는 것이 세상의 틈을 보는 사람에게는 큰 안심이 될 것이다.
■배우리(미술비평)
<     >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