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나 개인전

비는 늘 오고 있습니까

2026. 2. 14 – 3.14
The Grotto Art Window

비는 늘 오고 있습니까
Is there always rain
2026

비는 늘 오고 있습니까
비는 늘오고있습니다. 다만영원히함께맞지못합니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행위가 무위의 상태에 머물 수 있을까. 형상을 지우는 조각이 과연 가능한가. 박지나는 늘 이런 물음을 그의 조각을 보는 이에게 던진다. 아니 그보다는 보는 이가 스스로 물음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 맞겠다. 그는 자신의 조각을 공간을 박탈한 납작한 사진 안에 들여놓는다든가 아예 자음과 모음 선 안에 숨겨버린다든가 하는, 형상을 빚는 자로서는 다소 파괴적인 일을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결코 조각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손에서 조물조물 주물을 만드는, 감각의 행위를 좀체 놓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면서 작품을 지우는 사람이다. 이번에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새가 기억할까봐 새의 몸통을 지웠어”라고 말한다. 몸통을 완성하는 임무가 끝나면 결국 제거될 처지에 놓이는 복제인간이라도 되는 것인지, 그는 발화하지 않은 것조차 아예 증발시켜버렸다. 그렇게 우리가 들여다볼 전시장에는 비의 비명(雨鳴)과, 몸통 없는 새의 발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몸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낙하한 비와 비상하지 않은 새는 대지와의 접촉을 가리킨다. 최소한의 조각만 남은 자리에는 가닿음의 흔적이 남아있다. 비는 쓸려 내려가고 마른 땅만 남았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의 빗방울이 되어 대지 전체를 감싸던 촉촉한 미끄러짐을 기억에서 발굴해낼 수가 있다. 모든 방울들을 만난 그 날, 수많은 사람들이 명명(하지 못)한 그것, 그곳, 그시간 아니면 그사건. 사실 그 때(곳에서) 몸은 움푹 파였다. 웅덩이에는 다른 광물들이 재빠르게 채워진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의 웅덩이든 다른 운명을 맞이한 일은 없다. 언제나 비는 이내 흩어지고 말라버린 웅덩이는 비를 잊고 만다.
작가는 광물을 캐지도, 웅덩이를 발굴하지도, 그렇다고 원래의 사건처럼 비를 퍼붓지도 않는다. 그는 더 멀찍이 뒷걸음치고 더 희미하게 지운다. 피부의 감각을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떠올리게 하는 것이 가장 선명한 몸통이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 발화하고 나면 더 이상 조물조물할 핑계가 생기지 않을까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점을 늦추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저 상공에 둥둥 띄워진 몸통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위의 행위에 의해서만 실재하게 된다. 모든 게 불확실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도 잊은 채 서로 만나지 못하는 빗방울이다. 웅덩이를 만들 힘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대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서로가 좋아요를 아무리 눌러도 만날 수 없는 알갱이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어차피 불가능해서 아무리 외쳐도 예술가의 밥그릇을 빼앗지 않을 것만 같았던, “모두가 예술가”라는 진보적인 구호는 이미 도래했다. 모두가 예술가가 되었는데도 더 멀어진 ‘그’감각. 대지에 닿은 기억을 공유할 공간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이상한 일인가. 아,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자판을 두드리는 둔하고 맹한 사람이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중 하나는 전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서 서로의 몸을 응시할 수 있는 그런 곳. 잠시 허공을 날았으니, 그래도 언젠가는 모여 우리는 물이 될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빗방울은 물이 있기 전에 있었으니까. 지금의 외로움은 당연한 거다.
글 |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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