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고 얇게 흩어지는 몽상은 허공을 넘긴다
박지나 개인전 <부록; 낱장의 형태>
2017.07.17~07.25 문래예술공장 박스씨어터
“낱장의 형태.
그것은 흰 산을 떠올린다.
눈이 내린 것도 아닌데 흰 산이었다.
나무가 없는 산이었다.”
– 박지나의 작업노트 중에서.
사락…, 사락사락…, 사라락…, 사락…. 백색 소음 사이로 낱장의 종이는 지칠 줄 모르고 흔들린다. 사각의 작은 백색 공간. 그 안에는 서로 다른 감정, 단상, 기억의 무게를 담은 검고 작은 활자들이 묻어있다. 잉크의 흔적을 따라 미끄러지듯 이어지다가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에 도달하길 간절히 원했을 시선들은 쉴 새 없이 팔랑이는 표면에 의해 보기 좋게 외면당한다. 그렇게 하얀 공간은 그 안에 품은 검은 자취들의 정체를 쉬이 알려주지 않는다.
박지나는 주변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여러 형태들, 그에 대한 단상을 시적 상상을 바탕으로 한 시각적 은유의 연쇄로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의 시로, 수필로, 캔버스 위를 채워나간 연필의 자취로, 종이의 흩날림으로, 묵직한 조각의 형태로 모습을 달리하며 눈앞에 놓인다.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시하거나 강한 인상을 전달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염없이 맴돌고, 어딘가를 향해있으며, 작은 떨림과 움직임으로 공기 중에, 머릿속에, 기억 속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면서 마음 한편에 옅은 여운을 남긴다.
몽상이 묻은 낱장의 표면
2인전 <습도조절장치(Humidity Controller)>(2012)에서 선보인 <터진 허공, 못 끝에서 벌어지다>(2012)는 벽에 박혀 있는 하나의 작은 못이 공간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 단단한 벽에 박혀 제 기능을 다해야 할 것이, 허공에 박히는 상황. 허공을 향한 뾰족한 못 끝은 공간을 찢고, 공기를 찢으며 또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허공은 ‘단지 비어있는 공간이나 배경이 아니고 실체가 없는 공간도 아니다. 개별적으로 기능할 수 있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라고 언급한 작가의 말처럼, 그의 시적인 사유와 몽상이 멈추지 않고 흘러갈 방향을 무한히 열어주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또한 뾰족한 못의 끝. 그것은 마치 파열음의 파동처럼 허공의 공기를 가른다. 이렇게 몽상이 음을 입어 허공을 가로지르다 ‘흰 산’ 같은 여백을 지닌 사각의 얇고 납작한 공간을 만나면, 활자처럼 내려앉아 글이 되고 시가 된다.
흥미롭게도 박지나의 작업은 늘 공간과의 관계 안에서 놓여있는데, 여기서 일종의 타자이기도 한 공간은 몽상을 통해 사물이 되기도 하고, ‘그’가 되기도 하고, ‘그것’이 되기도 하면서 그의 작업에 중요한 줄기를 이루며 끝없는 관계의 연쇄를 형성한다. ‘그’와 ‘그것’은 작가의 작업에서 항상 관찰의 대상이 되는 것들로 작가의 감성을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부록’, ‘아주 작은 구멍’, ‘접시 위의 빵부스러기’, ‘별 것도 아닌 것’, ‘사라진 것들’, ‘부르르 떨고 있는 것들’, ‘사라져서 부르르 떨고 있는 것들’, ‘사라지지 못하고 부르르 떨고 있는 것들’, ‘빛이 투과될 만큼 얇았던 물속과 물 위 사이’, ‘나보다 가벼운 것들’, ‘그것보다 가벼운 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 ‘얼굴이 없는 것’, ‘같이 떨어져 나오는 것’, ‘금방 닳는 것’, ‘뭉그러지는 것’, ‘삼십 각뿔의 연필심’, ‘위아래 어금니들 사이의 공간’, ‘쏟아지는 것들’, ‘허공을 넘기는 것’, ‘끝나본 적도 시작된 적도 없는 것’, ‘흙냄새에 달라붙은 수분’, ‘소리를 내는 것들’, ‘소리를 듣는 다른 것들’, ‘낱장 위에 놓인 낱장들의 무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것’, ‘꾹꾹 눌러도 어디에도 담기지 않고, 꾹꾹 눌러도 단단해지지 않는 것’, ‘밑줄 위에 놓인 것들’, ‘컵 안쪽에 말라붙은 커피 얼룩’, ‘찢어진 살갗 위로 얇게 말라붙은 피’, ‘완벽하지 못한 그것’, ‘그것인 적이 없는 그것’, ‘분간할 수 없는 것’, ‘생생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는 그것’, ‘붙어있지만 겉도는 것’, ‘앞으로 갈 때마다 뒤로 밀어내는 것’, ‘보풀’, 그리고 ‘낱장’….
작가가 직접 적어 내려간 글에서 건져 올린, 이 낱개의 단어들과 문구는 작고, 여리고, 옅고, 얇은 몽상의 자취가 담겨있다. 그리고 이렇게 허공이 지닌 의미의 틈새를 자유롭게 가르는 몽상은 시가 되어 또 다른 허공, 여백을 품은 낱장의 표면에 묻는다. 박지나의 작업에 대한 이전의 비평적 관점들, 이를테면 ‘물질의 내밀성에 대한 몽상들이 구체화된 작품(최연하)’, ‘”허공”은 현실에 난 작은 구멍과 같다. 그곳은 텅 비어 있지 않고 오히려 역동적인 사유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거기서 그는 개별 사물들이 일으키는 새롭고 낯선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그것은 때로는 철학적이고, 때로는 매우 시적이다(안소연)’라는 언급 또한 그의 시적 상상의 대상들이 물질로서 존재하는 과정, 조형작업과 그것의 근간이 되는 시적 상상의 영역, 그리고 실제로 오랜 기간 이어져 오고 있는 작가의 시작(詩作)에 관한 부분을 짚고 있다. 그렇게 시적 상상의 대상이 되는 타자로서의 주변은 이웃한 것들과 몽상을 통해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미약하게나마 생생하고 분명하게 저마다의 존재를 서서히 입증해나간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부록; 낱장의 형태’는 박지나의 생각, 그의 시선이 머무는 것들, 그것을 사유하는 작가 자신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이자 삶의 태도를 반영한다. 스스로 여분의 부록임을 자처하지만, 분명 존재함으로써 그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 가볍게 흩날리는 낱장의 형태를 취하지만, 또 다른 낱장과 함께 나란히 놓이거나 유연하게 이어지고, 때론 단단하게 엮이면서 새로운 맥락과 갈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잠재적인 존재. 공기를 휘젓는 이 낱장의 형태들, 움직임들, 의미를 실어 나르는 소리들은 옅은 몽상을 입은 자유로운 시가 되어 한 장, 두 장 허공을 넘긴다.
■황정인(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