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받아쓰기, 번짐과 겹침의 세계로 열린 문
박지나 개인전 <받아쓰기 Dictation>
2018.04.26~05.15 최정아갤러리
‘받아쓰기’라는 말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받아쓰기’를 단순히 종이 위에 글자를 받아 적는 행위로만 이해한다면 비교적 익숙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받아쓰기’라는 말의 함의와 상징성을 탐색하기 시작하면 단어가 거느린 세계가 우주만큼이나 넓어진다. 박지나의 ‘받아쓰기’는 당연히 후자의 영역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왜 받아쓰려고 하는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언가를 받아쓰려면 받아씀의 ‘주체’와 받아쓸 ‘대상’이 있어야 한다. 박지나는 우선 받아씀의 주체로 스스로를 지목한 채, 한 권의 책을 받아쓰고 있다. 그녀가 선택한 텍스트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사뮈엘 베케트, 워크룸 프레스, 2016).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낱장의 종이들은 모두 그녀가 이 책을 받아쓰려 한 흔적들이다. 녹음된 음성도 마찬가지. 그녀는 손이 아닌 목소리로도 이 책을 받아쓰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썼다 지워진, 그래서 텅 빈 ‘기표/흔적’의 형태로만 남아 있을 뿐 애초의 텍스트를 재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는 애초에 이 작업이 재현에 목적을 두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받아쓰기’가 실은 ‘받아 쓸 수 없는 현실/불가능’과 ‘그럼에도 받아쓰려는 의지/가능’ 사이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텍스트로서의 타자’를 받아쓸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언가를 온전히 받아쓰려면 빛도 색도 소리도 전부 그대로 통과시키는 셀로판지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인간은 결코 그런 상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끊임없이 욕망을 낳고, 눈을 질끈 감거나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먼 곳으로 도망친다 해도 현실의 시공간으로부터 단절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타자를 온전히 받아쓴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내 안의 타자까지를 포함해서, 나와 다른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만큼 공허한 거짓은 없다.
그럼에도 박지나는 이 불가능한 받아씀을 지속하려 한다. 책임과 환대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안으로 닫힌 자가 아니라 밖으로 열린 자가 되어 울림과 번짐과 겹침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그 노력의 결과물이 <몸짓>과 <Dictation Autoportrait>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기도 한 <몸짓>은 종이가 통, 통, 통, 튕기는 소리를 통해 심장 박동을 연상케 하는데, 가만 보면 그 속도가 일정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작가는 “종이를 뒤에서 건드리는 날개의 개수, 종이의 크기와 두께에 따라 종이의 몸짓이 조금씩 달라진다”라고 말한다). 종이에도 영혼이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받아쓸 텍스트와 받아쓴 언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이 종이일 텐데, 그 종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명체로서 표현되고 있다는 건 의미심장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이는 우리가 받아쓰려 하는 것들을 온전히 받아쓰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변수로도 작용한다.
<Dictation Autoportrait>의 경우는 어떨까. 책의 군데군데 심어져 있는 이 ‘미러’는 텍스트로서의 타자를 받아쓰려 할 때마다 수시로 끼어드는 자아의 얼굴을 비춘다. 적게는 한두 문장, 많게는 단락 전체를 덮고 있기도 한 이‘미러’들은 자의식, 상념, 편견 등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방해꾼인 동시에 반대편 텍스트를 반영하는 거울상(mirror image)이기도 하다. 이것이 두 번째 변수일 것이다. 내부로부터의 훼방이든 외부로부터의 훼방이든 온전한 받아쓰기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들임에는 분명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약 이런 변수들이 없다면 어떨까. 언제나 선 텍스트의 복사본만을 옮겨 적게 되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옮겨 적는 작업이야말로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것 아닐까. 아마도 작가는 단순함 보단 복잡함이 지닌 미덕을 신뢰하고 있는 듯하다. 번짐과 겹침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 역시 그런 복잡다단한 사유의 회로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와 타자의 경계, 나와 나 아닌 것들을 반으로 정확히 나눌 수 없듯, 끊임없이 예외가 만들어지는 받아씀 속에서 불현듯 또 다른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받아쓰기를 통해 새로이 탄생한 자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름붙일 수 없다 해서 그것을 불가능이라고만, 절망이라고만 여길 것인가. 다시 처음의 물음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녀는 무엇을, 어떻게, 왜 받아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것, 언어로 받아 적을 수 없는 것들’을 ‘밖으로 열린 자의 몸으로’ 받아 적고자 했다. 그 과정은 무수한 변수로서의 ‘몸짓’을 동반하며 수많은 ‘미러’들을 통과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때가 바로 번짐과 겹침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 기회이기도 하다. 예기치 못한 장면이, 감정이 끼어들어야만 의외의 세계는 나타나고 언어들은 보다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수 있을 테니까.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미끄러지고 녹아내리고 흩어지다가도 다시 솟아오르는 자이다. 섬광처럼 솟아오르는 자이다. 아마도 이런 받아쓰기를 지속하는 한, 그녀는 계속 불가능과 가능 사이를 헤맬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언제고 길 위의 모험가로서 존재할 것이다.
■안희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