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물, 글과 종이, 말과 공기
박지나 정수용 2인전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무관했을까요> 
2021.09.18~09.26 space xx
1. 글과 종이
종이는 한때 내가 만들어 놓은 글의 뭉치를 또 다른 한계 안에서 펼쳐 보이기에 적당하다. 종이 보다 가벼운 허공에 깜박거리는 글자를 가져다 놓는 일은 어떤 형상을 생각하며 비어 있는 곳에 젖은 흙을 붙이는 조각가의 행위와 닮아 있다. 어떤 대상과 떨어뜨려 놓은 적 없던 글을 따로 종이에 옮기는 일은 축축한 점토로 만든 형태의 표면을 주물로 떠내는 조각가의 또 다른 행위와도 닮았다. 어떤 윤곽과 양감을 가진 글 뭉치를 허공에 가만히 띄워 놓고 바라보는 행위는 그 형태의 진위를 알기 위함 보다 거기서 어떤 형상이 서사를 갖게 될 순간과 마주하기 위해서다. 종이에 옮겨 놓은 글은 그 임의의 순간을 떠낸 형태의 두께와 무게를 암시하며 글과 종이의 현존을 드러낸다.
글과 종이의 현존은 글자의 잔해로부터 뭉뚱그려진 수직의 긴 형태로 나타났다. 얇고 반투명한 종이에 인쇄된 글자 더미는 진위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잔해의 흔적들로 간신히 제 형상을 수습하고 있는 것 같다. “흩어지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독백과 함께 임의의 윤곽과 양감을 가진 육체를 다시 허공에 일으켜 세우려는 조각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회색 빛 알루미늄으로 피부를 얇게 떠낸 저 인체 형상의 잔해들과 흙으로 채운 몸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힘겹게 주물 뜬 또 다른 인체 형상의 잔해에 대하여 두 손으로 더듬듯 다시 떠올리며, 나는 지금 허공에 글을 가져다 붙이면서 종이에 옮겨질 이 글의 크기와 무게를 가늠해 본다. 글과 종이가 둘의 조각처럼 오로지 그것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2. 흙과 물
수용은 지난 겨울에 흙으로 어떤 형상을 만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건 지나가 말해줬다. 지난 겨울은 몇 계절 앞선 시간을 말하기도 했고, 내게 생기 없이 오래된 시간을 뭉뚱그려 환기시켜 주기도 했다. 수용은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과거의 어떤 시간에서도 젖은 흙을 손으로 떼어내 아직 드러나지 않은 형태의 윤곽을 허공에 붙이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의 형상이었는데, (그가 흙으로 사람이 아닌 것을 만든 적이 있었던가?), 어딘가 늘 힘껏 부풀어 올라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일 지도 모른다. 그 부풀어 오름은 어떤 윤곽이나 양감으로 보여진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그 존재의 부풀어 오름을 알아차린 것이다. 어째서인지 나는 수용이 점토로 만든 인체의 형상은 늘 부풀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작은 엄지 발가락의 진동>(2021)은 한번도 본 적 없던 양감의 파열을 드러낸다. 하지만 산산조각 난 흙덩어리의 붕괴는 잔뜩 부풀어 오른 배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제 형상의 윤곽을 훼손시키는 법 없이 도리어 흙의 원초적인 알갱이들로 되돌아가 형태를 다시 수습하게 될 어떤 가능성까지 암시한다. 이 붕괴된 흙덩어리가 시사하는 형태에 대한 가능성이란, <해양의 근육>(2021)이나 <가슴이 융기한 남자의 상반신>(2021)의 현존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의 현존. 수용은 흙이 물과 결합하여 스스로 어떠한 덩어리의 양감을 나타내는 조각적 태도를 갖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알고 있다. <해양의 근육>은 그러한 조각적 태도의 현존인 셈이다. 물을 머금은 축축한 점토로, 수용은 힘껏 부풀어 올라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근육의 윤곽을 만들어 땅으로부터 들어올려진 전시장의 벽에 가져다 놓았다. 그것은 <작은 엄지 발가락의 진동>에서 이미 붕괴된 흙의 잔해들 혹은 기원으로부터 수습되어진 형상의 조각적 긴장감을 발휘한다.
<작은 엄지 발가락의 진동>은 (예외의) 조각적 긴장감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의도를 벗어난 조각적 상황의 발생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의 부조리 혹은 모순 때문에 조각적 긴장감을 가중시키는 것을 뜻한다. 지나는 그 상황의 목격자다. 수용의 소조 작업대 위에 비닐과 노끈으로 꽁꽁 싸맨 흙더미가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중력을 향해 와르르 쏟아져 내린, 그 한계의 상황을 지나가 봤다. 한껏 부풀어 오른 배를 드러내며 속옷 차림에 수영모를 쓰고 있는 등신대의 여성의 신체는 형태 안에 이미 잠재적인 파동과 파열을 함의하고 있(었)다. 감은 눈과 꼭 다문 입에 의해 (구조가) 닫혀 있는 얼굴과 뒤로 깍지 낀 양손과 팽창해 있는 복부의 근육에서 스스로의 힘을 거의 폐쇄시켜 버린 것 같은 이 육체는 마치 숨을 내뱉지 못해 어떤 응축된 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완과 수축/응축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을 해부학적 신체로 증명해낸 이 <작은 엄지 발가락의 진동>은, 조각적 긴장감을 뜻밖의 예외적인 경로에서도 드러냈다. 지나가 목격했던 것이 그것이다. 마치 저 뱃속에서 양수에 쌓여 있던 태아가 바깥으로 나오게 되는 서사를 상상하면서, 흙으로 구축된 인체 소조의 형상은 흙을 응축시키는 물이 얼어붙어 팽창하게 되면서 조각적 긴장 상태를 유지하다 예외적인 형태의 파열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수용은 이러한 파열과 붕괴의 국면을 조각적 긴장감으로서의 당위로 전환한다. 그리스 조각에서 라오콘과 두 아들의 구조적인 관계를 참조했던 <그의 아들 1>(2020)과 <그의 아들 2>(2020) 연작에서도, 수용은 두 아들의 신체를 조각적 상황에 끌어들여 원본의 서사적 긴장감을 조각적 형태의 긴장감으로 대체한 바 있다. 라오콘의 아들들을 모사한 작은 인체 형상을 석고 주형 안에 가둔 듯한 형태 상의 구조는, <작은 엄지 발가락의 진동>처럼 조각적 절차와 방법을 하나의 조각적 (인체) 형상으로 변환해 조각이 지닌 태생적인 긴장감을 보여준다.
3. 말과 공기
지나가 내게 들려주었던 말들은 여태 허공에 있다. “벌린 다리 사이로 흙이 쏟아졌다. 아니 벌린 다리 자체가 쏟아져 내렸다. (…) 사람의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허벅지. 그 덩어리들은 바닥에 쌓이고 흩어졌다. 마치 다리 사이에서 양수가 터진 것처럼. 허벅지가 지탱하던 것을 대신하듯 두 발은 여전히 바닥을 정확하게 딛고 있다. 두 발 사이에서 점점 가벼워지는 허벅지의 잔해들.”
허공은, 지나가 조각적 공간으로 살펴왔던 현실의 공백을 채우는 실체다. 보이지 않는 공기가 목소리를 무겁게 누르면서 한참을 아래로 가라앉히고 저- 위로 가볍게 다시 떠오르게 했다가 그것을 충돌시키고 다시 뭉뚱그려 얼마만한 덩어리로 만들어 놓기도 하는데, 그것은 흙과 결합한 물처럼 허공을 단단하게 해준다. 단단해진 허공은 다시 불확실한 (육체의) 잔해들을 위한 자리, 그것의 조각적 받침대와 같은 위상을 자처한다.
(2016)에서, 육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두 발의 잔해 같은 형상은 허공에 멈춰 있다. 저 불확실한 인체의 형상은 허공에 떠올라 잠시 부유하는 것 같다가도, 먼지처럼 아무렇게 흩어지지 않고 그것의 자리를 수직으로 지탱해 주는 (중력의) 힘에 반응하며 조각적 긴장감을 희미하게 나타낸다. 말하자면, 수용의 미완성 작업이 비닐에 싸인 채 다리가 무너져 내린 것을 보고 그 허벅지의 잔해들 속에서 여전히 땅을 딛고 서 있는 두 개의 발을 바라보던 지나의 독백처럼, 오래 전 자신의 몸에서 떠낸 두 개의 발 형상은 단단한 허공을 딛고 서 있다.
<쉽게 떠오르는 몸에게>(2021)가 엮어내는 연작들은 지나가 자신의 몸에서 떠낸 작고 불완전한 잔해들이다. 하지만 단지 (목)소리의 형상으로만 현존하는 <잔해로부터>(2021)의 서사가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어떤 무게와 질감과 윤곽을 인식하게 하는 것처럼, 일련의 잔해로서의 불완전한 형상들 또한 조각적 인식을 유도한다. 그것은 <잔해로부터>의 형태 상의 구조에서도 가늠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앞에서 이야기 했던 흙과 물의 결합에 의한 점토의 소조적 힘과 마찬가지로 물과 결합한 파란색은 텅 비어 있는 흰 종이 위에 제 형태의 임의적인 윤곽과 그것의 불확실성 마저 현존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형태에 대한 윤곽으로 삼아, 그 내부에 존재하는 소리에 대한 양감과 질감의 조각적 인식을 가늠케 한다.
지나는 오래 전에 내게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 허공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그 시작과 끝을 연결해 주는 공간이 조각적 공간이기도 하다. 앞에서 “어떤 형상을 생각하며 비어 있는 곳에 젖은 흙을 붙이는 조각가의 행위”에 대해 말했던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내부의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공백으로부터 형태의 정당한 윤곽에 이르는, 그리고 조각적 형상의 현존이 자리하고 있는 일련의 조각적 받침대로서, 허공을 삼차원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지나의 조각적 태도를 말해준다. 그래서인가, <쉽게 떠오르는 몸에게>는 조각의 받침대 같은 흰색의 공허한 형상들이 허공을 물리적으로 측정하고 있는 듯한 태도로 조각적 잔해들이 지닌 인체 형상의 희미한 윤곽을 삼차원적인 공간에서 쉽게 떠오르도록 돕는다.
4. 우리는
우리는 가끔 서로를 바라본다. 지나는 수용의 작업대를 겨울 내내 지켜봤고, 나는 지나가 사유하는 허공의 실체를 말과 글이 놓인 장소에서 알아 볼 수 있었다. 지나는 내가 허공에 점토처럼 붙여 놓은 글의 윤곽을 신중하게 살피고, 수용은 그것을 떠낸 글과 종이의 무게에 대해 말한다. 글과 종이, 흙과 물, 말과 공기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무관하지 않은 긴 시간들을 보내왔다. 그 시간은 각자의 몸에 밴 조각적 행위와 언어로 조용히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해왔다. 흙과 물, 말과 공기, 글과 종이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소연(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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