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나타납니까.당신은언제나있습니다.
박지나 박효빈 2인전 <나는 나타납니까 Do I appear> 
2023.03.10~03.31 10의n승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말.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업적은 무엇인지, 어떤 사물, 그리고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알리는 소란스러운 자기소개들 속에서 본인이 드러나고 있는지 묻는 존재라니, 만약 혁명이 다시금 필요해진다면 익명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새겨놓은, 나의 패배주의 아래 깊숙이 숨겨놓은 낫을 끌어올리고도 남는 물음이다. 그 질문을 한 존재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그것이 맞다면, 단지 전율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그것이라면 말이다. 낫 주인의 타령, 시작한다.
박지나는 자신의 시와 조각이 서로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조형을 만들어가도록 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실 그렇게 만들어진 또 다른 조형이라는 건, 시와 조각이 서로의 형상을 더욱 뚜렷하게 다듬어주기보다 서로를 파먹어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그가 만지는 것, 그가 감각하는 것에 대해 재현하는 것을 각기 다른 예술 언어에 미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시도를 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조형과 박효빈의 회화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의할 수 없는 무엇과 조우하거나 그것을 통과하는 기분을 박효빈 작가라면 알지 않을까, 박지나는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박효빈은 화면에 이미지를 고정하지 않고, 사라지기 직전 혹은 나타나기 직전인 것처럼 흘러내리는 유채로 슬쩍 덮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화가에게는 붙잡기 힘든 존재인 ‘비’ 그림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사람의 ‘비’에 관한 전시가 시작되었다.
하늘로부터 주룩주룩 내리고 무언가에 부딪치면 어디론가 빨려 나가는 비는 박지나의 형상과 박효빈의 그림으로 단단히 붙잡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이 전시의 물음, 그리고 “우리는 언제 가장 확실해지나요? 가장 확실해질 때가 가장 오래 가장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은 금세 그 형상을 지운다. ‘나’가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 작가인지, 미지의 화자인지, 비인지, 존재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할 수 있도록, 빗물 왕관이 흩어지고 지지직거리던 회화의 잔상도 꺼지도록 둬야 한다.
작품은 사라졌다. 작가는 형상을 불러 세우는 행위를 거듭하지만 그럴수록 그 존재는 더더욱 멀어지고 만다. 어떤 설명도 주장도 하지 않고 위트도 타자도 강요하지 않는, 그저 무언가를 계속 놓아주는 작업은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은 채 전시장에 느낌들만 둥둥 띄운다. 비혁명적으로. 아니, 그들은 불러 세운 적이 없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완전한 오해일 수도 있다. 확실히 이 글은 형상들을 파먹었다. 아무튼 남은 느낌 부스러기만 주워 든 이 사람은 비 조각과 비 그림이 모두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질문에 ‘당신은 언제나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일이다. 그 말 덕분에 끌어올려진 낫은 잠시 비를 맞고는 마른걸레에 싸여 다시금 깊숙한 곳에 놓인다. 내일은 웅덩이가 말라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당신은 있습니다.
■배우리(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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