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타납니까. 당신은언제나있습니다.
박지나 박효빈 2인전 <나는 나타납니까 Do I appear>
2024.12.13~12.27 최정아갤러리
■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말.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업적은 무엇인지, 어떤 사물, 그리고 누구와 어떤 관계인지 알리는 소란스러운 자기소개들 속에서 본인이 드러나고 있는지 묻는 존재라니, 만약 혁명이 다시금 필요해진다면 익명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새겨놓은, 나의 패배주의 아래 깊숙이 숨겨놓은 낫을 끌어올리고도 남는 물음이다. 그 질문을 한 존재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는 그것이 맞다면, 단지 전율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그것이라면 말이다. 낫 주인의 타령, 시작한다.
▤
박지나는 자신의 시와 조각이 서로의 언어를 주고받으며 또 다른 조형을 만들어가도록 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실 그렇게 만들어진 또 다른 조형이라는 건, 시와 조각이 서로의 형상을 더욱 뚜렷하게 다듬어주기보다 서로를 파먹어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가가 그가 만지는 것, 그가 감각하는 것에 대해 재현하는 것을 각기 다른 예술 언어에 미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애초에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시도를 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그가 이번에는 자신의 조형과 박효빈의 회화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정의할 수 없는 무엇과 조우하거나 그것을 통과하는 기분을 박효빈 작가라면 알지 않을까, 박지나는 그렇게 느낀 것 같다. 박효빈은 화면에 이미지를 고정하지 않고, 사라지기 직전 혹은 나타나기 직전인 것처럼 흘러내리는 유채로 슬쩍 덮어놓기 때문이다. 그런 화가에게는 붙잡기 힘든 존재인 ‘비’ 그림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두 사람의 ‘비’에 관한 전시가 시작되었다.
□
하늘로부터 주룩주룩 내리고 무언가에 부딪치면 어디론가 빨려 나가는 비는 박지나의 형상과 박효빈의 그림으로 단단히 붙잡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이 전시의 물음, 그리고 “우리는 언제 가장 확실해지나요? 가장 확실해질 때가 가장 오래 가장 깨끗하게 사라질 수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은 금세 그 형상을 지운다. ‘나’가 누구인지, ‘우리’는 누구인지, 작가인지, 미지의 화자인지, 비인지, 존재인지 알 수도 없지만 그것은 분명 자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할 수 있도록, 빗물 왕관이 흩어지고 지지직거리던 회화의 잔상도 꺼지도록 둬야 한다.
작품은 사라졌다. 작가는 형상을 불러 세우는 행위를 거듭하지만 그럴수록 그 존재는 더더욱 멀어지고 만다. 어떤 설명도 주장도 하지 않고 위트도 타자도 강요하지 않는, 그저 무언가를 계속 놓아주는 작업은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은 채 전시장에 느낌들만 둥둥 띄운다. 비혁명적으로. 아니, 그들은 불러 세운 적이 없을 수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완전한 오해일 수도 있다. 확실히 이 글은 형상들을 파먹었다. 아무튼 남은 느낌 부스러기만 주워 든 이 사람은 비 조각과 비 그림이 모두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나는 나타납니까’라는 질문에 ‘당신은 언제나 있습니다’라고 답하는 일이다. 그 말 덕분에 끌어올려진 낫은 잠시 비를 맞고는 마른걸레에 싸여 다시금 깊숙한 곳에 놓인다. 내일은 웅덩이가 말라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당신은 있습니다.
■배우리(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