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이렇게 비처럼 나를 드러내
나는 너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를 맞을 거야. 너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너와 구별될 거야. 나는 비를 맞으면서 비와 구별될 거야. 나는 너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를 할 거야. 나의 기도와 너의 기도는 구별될 거야. 너는 매일 거기서 잠을 자지만 늘 문을 열어놓지. 언제든 내가 들어갈 수 있게. 언제든 내가 나올 수 있게. 우리가 잠시 만나서 같이 노래를 부를 수 있게. 우리가 잠시 만나서 같이 밥을 먹을 수 있게. 우리가 잠시 만나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게. 우리가 잠시 만나서 서로에게 물을 건넬 수 있게. 이렇게 우리는 만나서 접촉하지만 쉼 없이 서로를 떠나지. 너는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로부터 떠나지. 나는 거기에 있으면서 거기로부터 떠나지. 내가 너를 거기에 남겨둔 것일까. 내가 거기에 남겨진 것일까. 남겨둔 너에게서 쉬지 못하는 나를 봐. 남겨둔 너에게서 집착하는 나를 봐. 남겨둔 너에게서 폐쇄적인 나를 봐. 남겨둔 너에게서 공격적인 나를 봐. 남겨둔 너에게서 포기하려는 나를 봐. 남겨둔 너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은 나를 봐. 남겨진 나에게서는 비의 냄새가 나. 남겨진 나에게서는 동물의 냄새가 나. 남겨진 나에게서는 낯선 사람의 냄새가 나. 남겨진 나에게서는 흙의 냄새가 나. 남겨진 나에게서는 불의 냄새가 나. 남겨진 나에게서는 바람의 냄새가 나. 나는 냄새를 풍기면서 떠나. 내가 떠나면서 보는 것들을 너는 볼 수가 없어. 내가 떠나면서 보는 새들의 움직임이나 새들이 만들어 내는 바람이나 그 바람의 냄새를 맡는 나의 표정을 너는 볼 수가 없어. 나에게 은은하게 밴 냄새를 살짝 맡을 수는 있겠지. 나도 나를 떠나면서 내가 볼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놓쳐. 나는 떠나면서 방향을 고민하는 새의 표정을 보지 못했고, 새가 뻗은 다리를 보지 못했고, 새가 바람과 마찰하는 장면이나 소리를 보거나 듣지 못했어. 나는 떠나면서 네가 웃거나 우는 얼굴을 보지 못했고,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네가 밥을 짓는 표정을 보지 못했어. 결국 우리는 떠나지 않아도 그리고 떠나면서도 놓치는 것들이 많다는 거야. 그렇게 놓치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사이에 수도 없이 많겠지. 그렇게 놓치는 것들이 남겨진 우리의 중심이겠지. 나는 냄새가 밴 몸으로 언제든 너에게 갈 수 있고, 너와 교류할 수 있지만 나는 너와 섞일 수가 없어. 나는 언제든 너에게 갈 수 있고, 너를 만질 수 있고, 너의 것을 빼앗을 수 있지만 너와 합쳐질 수가 없어. 여기에서 또 거기에서 너는 나를 모으고, 나는 너를 모을 수 있지만 우리는 섞일 수가 없어. 왜냐하면 비가 오는 시간은 늘 이르거나 늦거든. 바람이 부는 시간은 늘 이르거나 늦거든. 네가 입을 여는 시간은 늘 이르거나 늦거든. 내가 입을 여는 시간은 늘 이르거나 늦거든. 이것이 우리가 시간에 그리고 공간에 집착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해. 우리가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해. 여기의 가장자리, 거기의 가장자리에는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기도 하고, 온기와 한기가 함께 있어. 그냥 이렇게 비의 시간에서 네가 나타나. 그냥 이렇게 비처럼 나를 드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