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꺼내는 사람
그가 비를 들고 있다. 제 안에서 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안에는 비가 가득하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기분이 가득하다. 언제든 그의 몸보다 커질 수 있는 기분이 가득하다. 언제든 바짝 마를 수 있는 사랑이 가득하다. 그는 몸이 출렁일 때마다 비를 꺼냈다. 비를 꺼내도 출렁이는 슬픔 같은 것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를 꺼내도 출렁이는 사랑 같은 것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꺼내든 비는 그의 살처럼 스스로를 넘치면서 흘러내리면서 솟아오르면서 진동하면서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세탁기에 물이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물에 잠겼다. 숨을 참으면서 이불과 같이 몸을 불렸다. 물이 빠져나가고 다음 물이 차오르기 전까지 그는 부피를 조금씩 키웠다.
빨래를 하는 날은 비가 오지 않았다.
몸을 버리고 싶어. 몸이 커질 때마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가 중얼거리자마자 곧바로 몸들이 들이닥쳤다. 몸들에서 비를 꺼내는 그의 손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흔들렸고 텅.텅.텅. 비어 있는 소리를 내면서 여러 줄기로 갈라졌다. 그의 손은 썩은 뿌리처럼 마른 뿌리처럼 쉽게 끊어졌다. 끊어지는 손과 비의 체온이 같아졌다. 이것은 밀착의 온도일까. 이것은 상실의 온도일까. 이것은 추락의 온도일까. 떨어지는 자신을 받아 마시면서 비는 굵어졌고 그의 손은 끊어질 때 가장 선명했다.
그는 이불 위에 비를 내려놓았다.
비는 그와 이불 사이에서 벌거벗었다.
비가 비에서 물러났다.